남쪽 계절풍이 제주와 남해 그리고 부산으로 불어오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름 서핑과 다대포의 계절이다.” 2021년 여름의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파도의 속도와 나의 속도가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 그때부터 서핑은 내게 물놀이가 아니게 되었다.
비행기가 김해공항으로 착륙하고 있었다. 우리는 부산에 온다는 걸 집에 알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관광객이 되어 도착한 고향이었다. 예약해둔 숙소에 짐을 풀었다. 파도가 나를 넘어갔다. ‘현지인 맛집’을 검색해 밥을 먹었다. 파도가 나를 넘어갔다. 나는 조용히 목덜미를 만졌다. 혹시 부산이 여전히 나의 목을 조르고 있을까봐. 부산을 떠난 지 몇 해가 흘렀으나 여전히 부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보려고. 민과 나는 다대포에서 차로 이십 분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때도 다대포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둘 다 각자의 집에서 가까운 반려 해변이 있었고 현관까지 딸려 온 해변의 모래를 터는 건 일상이었으나 좀체 바다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다대포에는 일몰을 봐야 한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거나 ‘바다 미술제’를 할 때만 갔다. 내가 언제 다대포에 갔는지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다대포와 등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했다. 민은 갑작스러운 휴강으로 네다섯 시간이 비었을 때 한두 번 가본 것이 전부라고 했다. 얼마 전에 생긴 지하철역 교차로에 서서 우글거리는 서퍼들을, 우리는 이국적인 풍경인 듯 바라보았다. 일고여덟 명씩 짝지은 강습 팀이 사방의 서핑 샵에서 쏟아졌다. 횡단보도의 중간쯤, 반대편에서 건너오는 서퍼들과 교차할 때였다. “오늘 차트가 너무 좋아서 반차를 썼다.” 그들은 내가 잃어버린 나의 미래였다. 계속 부산에 살았다면 편하게 서핑을 즐겼을 텐데. 부산을 떠나기 전에는 왜 한 번도 서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서울에서 별안간, 서핑에 빠지다니. 고향에 서핑 여행을 오다니. 바다를 떠나자 파도를 갈망하게 되었다. 삶의 아이러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부산을 떠나는 걸 상상해본 적 없었는데 나는 언제부터 부산이 나를 목 조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원하는 직업이 서울에만 있다는 건 그저 핑곗거리였다. 울타리.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부산이라는 울타리였다. 서서히 좁아지고 있던, 서서히 높아가고 있던. 나는 울타리 안에서 한때 즐거웠다. 편안하고 안전했다. 그런데 몇몇이 나를 잘 모르겠다고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의 기분과 과거의 일들과 심지어 근미래까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인데”라는 반복된 질문에 시달렸다. 분명 무언가 있긴 했다. 복잡하고 불쾌한 무언가가.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고, 생각할수록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갔고, 사랑하고 사랑해도 사랑할 체력이 넘치는 그들이 버거웠다. 그들은 나를 찢어발기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우리’가 ‘우리’가 되려면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다그쳤다. 술잔을 부딪치고 웃고 떠들고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시작되는 비난과 욕설과 섭섭함을 구토하는 난장을 침묵으로 견뎠다. 나는 무엇을 숨겼던가. 숨기는 게 없다는 것을 숨겼을까. 벌거벗는 것이 손쉬웠을 것이다. “저들은 역겹고 혐오스럽네.” 울타리 건설을 마친 그들은 은어를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이 불쾌했는지 서서히 깨달았다.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울타리 바깥을 거대한 사냥터로 여긴다. 나도 그 안의 ‘우리’였다. 끔찍하고 끔찍해서 서둘러 울타리를 떠났다. 그쯤 부산은 내게 거대한 울타리 그 자체였다. 부산을 떠난 뒤에도 ‘부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부산을 증오했고 뛰어넘고 뛰어넘고 뛰어넘고 싶었다. 부산을. 부산 같은 모든 것을. 부산에서 가장 먼 사람이 되려고 있는 힘껏 나를 비틀어 뽑는 상상 했지만 그런 일은 쉬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부터 증오해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산에 있었으니까. 이것이 내가 서울에 온 첫 두 해를 꼬박 바쳐서 세웠던 울타리였다. 서울에서도 안팎을 구획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당연히 뿌리 내리지 못했다. 나는 공항에 덩그러니 남겨진, 휩쓸리기 싫어서 누구도 탐내지 않는, 정체불명의 캐리어가 되었다.
다대포는 모래사장이 깊고 길어서 보드를 머리에 얹고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젖은 모래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나는 웻슈트만 입으면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져서 주변 서퍼에게 오늘은 어느 포인트들에서 타고 있는지 물었다. 다대포는 파도가 깨지는 포인트 간의 거리도 충분하고 해변도 길어서 서퍼 간에 간격이 충분했다. 바다에서도 출퇴근 전철의 기분을 느끼는 건 싫었다. 무엇보다 2021년 여름에는 부대끼고 싶지 않았다. 한꺼번에 밀려오는 삶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연초부터 결혼식 준비와 신혼집 마련을 동시에 시작했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대출을 받아 전셋집을 구했다. 매매가격과 전셋값이 같았지만 요즘은 다 이렇고, 갭투자를 적극적으로 해서 이렇게 집을 몇 개씩 굴려야 하며, 당연히 부동산은 절대 망할 일이 없는 데다가 HUG 보증 보험에 가입을 하면 전세금은 문제없다는 중개사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데 보증 보험 심사에서 탈락했다. 사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잠들지 못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전세 사기 뉴스를 자꾸 보여주었다. 사기 피해자의 아둔함을 욕하고 조롱하는 댓글을 읽고 또 읽었다. 잘 모르거나 상대를 믿으면 사기를 당해도 된다는 것이 사회의 상식이라는 게 이상했지만, 이런 비난은 빠르게 체화되었다. 보증 보험 가입 서류를 다시 준비하는 동안,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별일 없이 일상을 살면서도 불쑥 나는 그들의 언어로 나를 비난했다. 직장에서는 이제 나만 잘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떠안기 시작했다. 인원이 줄었으나 충원은 되지 않았다. 정성껏 하지 못할수록 자괴감이 불어났다. 책 만드는 걸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잘하고 있는 건지는 계속 의심해야 했다. 선배들에게는 그래도 이 회사만 한 곳이 없다는 말을 줄곧 들었다. 나는 그들의 납작함이 우스웠으나 이것도 금방 내 것이 되었다. 여기가 아니면 나를 받아줄 리 없다는 생각에 잠식되자 회사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과 앞으로 요구할 모든 것에 기웃거렸다.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함께 쓰던 친구가 등단했다. 나는 친구가 자랑스러워서 울었으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한심해서 울었다. 업무 마감일이 이 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억지로 연차를 쓰고 떠나 온 다대포였다.
‘바다에서는 바다의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곳에서 지켜온 유일한 규칙이었다. 이번에는 잘되지 않았다. 해변에 늘어선 아파트에서 바다 바깥의 일들이 밀려왔다. 나는 몇 개의 파도를 놓쳤다. 파도는 내게 집중하라고 다그쳤다. ‘이 파도는 내 것이 아니고, 저 파도도 내 것이 아니고, 아! 이 파도는 내 것이었는데 놓쳤고……. 비소로!’ 나는 보드를 해변 쪽으로 돌리고 힘차게 팔을 저었다. 파도가 보드의 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의 숨소리를 가장 크게 들으며 나는 부드럽게 일어섰다. 파도는 나를 파도의 속도만큼 해변으로 밀어 보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민과 영이 노을을 이끌며 내게 밀려오고 있었다. 주황빛으로 물든 우리는 파도의 허리에서 넘실거렸다. 늦은 밤 해수욕장을 걸으면서 어쩐지 내가 부산을 대하는 태도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파도는 부산을 향한 나의 적의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나를 휩쓸었다. 울타리 안팎은 의미가 없었다. 둘째 날 오전 일찍 서핑 샵에 갔는데 이미 보드 대여가 끝났다고 했다. 한여름의 다대포였다. “보드를 사자!” 영이 내게 말했다. 민은 중고 보드를 하나 갖고 있었다. 1년 전 민과 영이 내게 중고로 보드를 사자고 했을 때, 나는 둘 곳도 없고 거치할 차도 없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사두고 방치했던 기타와 하모니카와 레고와 LP들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보드를 사자!” 나도 말했다. 서핑이 더는 지나가는 바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내 삶에서 언제까지나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파도라고 믿었다. 복귀해서 마감을 극적으로 맞추었다. 퇴사 시기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HUG 가입이 승인되었다. 그제야 집에서 편히 잠들었다. 나의 시간과 마음을 온전히 쏟고 있는 존재들과 새롭게 관계를 형상하고 싶었다. 울타리의 방식이 아니라 파도의 방식으로. 공동 현관문이 열리자, 선선한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다. 여름도 끝이었다.
2년 후 봄. 나는 전세사기를 당했다. 그 후로 두 번의 여름이 더 지났다. 나는 나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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