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xx 똑같은 속도와 높이의 인공 파도가 밀려오는 중이다. 나는 발목에서 찰랑이는 모래 없는 파도를 본다. 입구에서 일본인들이 감탄사와 함께 쏟아져 들어온다. 너는 그들 사이에 있었다. 두 달 전 부산 송정해수욕장에서 보았던 ‘너를 닮은 일본인’은 너였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그때와 똑같은 옷으로, 똑같은 느낌으로, 그러나 전보다 더 단단해진 근육과 군살 없이 날렵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일상을 되찾은 사람의 모습으로 혹은 한 번도 잃어본 적 없는 사람의 당당함으로. 나는 내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길었던 머리를 잘라서, 무너진 몸과 마음이라 네가 알아볼 일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파도를 타는 너의 습관과 너의 환희를 오래 바라보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눈빛으로 반짝이는 너의 눈동자도. 눈이 부셨다.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2021.07.xx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바다에서 출렁였다. 그러나 강한 바람이 우리의 보드를 뒤집었을 때 몇 번 세수하다가 벌게진 눈으로 주변을 보았지만 너는 없었다. 해변 기준점으로 삼은 세븐일레븐에서 나는 꽤 떠내려와 있었다.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너는 왜 나를 부르지 않는 걸까. 너는 왜 듣지 못하는 걸까. 이런 날에도 생은 흘러가야 한다는 듯, 어떤 불행은 반드시 혼자 겪어야 한다는 듯, 커다란 파도가 나를 삼키려고 했다. 나는 가까스로 파도의 어깨를 잡아탔지만 힘을 주어 중심을 잡는 일과 가고 싶은 방향을 바라보는 일에 그만 시들해졌다. 세븐일레븐이 아득하게 보였다. 너는 세븐일레븐에서 직선을 그은 바다로 돌아와 있을 텐데, 균형을 잘 잡으니까. 스트레스 관리가 잘 되니까. 나는 너를 향해 팔을 저었다. 파도에 휩쓸리면서, 팔꿈치를 보드에 기댄 채 헛구역질을 반복하면서. 너는 없었다. 바다를 다 뒤졌지만 없었다. 네가 세상에서 혼자 출렁인다고 생각하니 윤슬마저 몰려다니는 건달들 같았다. 나는 파도보다 먼저 무너졌다. 매번 정교하게 계산해야 하는 폭파 철거 현장처럼, 그 위에 다시 건물을 올리는 일처럼, 파도 위에 올라서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자세를 잡고 있는지 알려주는 거울이 없어져서 나는 나의 흔들림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남겨진 모래성이 되었다. 모두가 아무렇게나 밟고 지나가는 이미 반쯤 무너진 모래성.
2020.07.xx 오늘은 바다가 장판이네. 그래도 호텔 침대처럼 누워 있자. 보드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있어도 안전할 테니까. 침대에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보드를 간질일 때면 잠들기 직전의 뒤척임 같을 테지만 오늘은 말끝마다 좋다고 해야 직성이 풀릴 날씨니까. 파도가 없어도 좋아. 물에 들어오니 좋아. 깨끗하게 씻고 좋은 향이 나는 잠옷을 입고 부스럭거리는 이불 속인 것 같아서 좋아. 오늘은 과식하지 않는 일상 같아 적당히 흔들리면 잘 살고 있는 것 같잖아. 단단해질수록 불안하다니까. 폭삭 주저앉는 걸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야. 오전 바람 없음. 정오 바람 없음. 오후와 저녁에도 바람 없음.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구나. 작게 주름진 파도를 툭툭 털어서 잘 펼쳐놓자. 정돈은 마음의 얼굴이니 집보다 호텔에서 더 깔끔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약속. 나는 너도 모르는 너의 작은 모습들을 주워 와서 작은 유리병에 담아두고 싶다. 가령 머리칼이 어떻게 해풍을 가두는지. 파도 앞에서 어떤 눈으로 빛나는지. 조용한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가 쓸려 가기를 반복하자. 간지러움으로 서로를 침범하자. 작고 잔잔하게 시작하는 사랑이야. 큰 파도를 예감하는 사랑이야.
2022.08.xx 우리가 우연히 마주친 곳은 자갈치 시장 태평빌딩 앞이었다. 도개교 행사가 끝난 영도대교는 생선 비린내로 진동했고 올라탈 파도 없는 바다와 작은 고깃배들의 출렁임을 보았다. 너는 일본에 간다고 말했다. 다시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쩐지 슬프기보다 비참해졌다. 작년 여름의 증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메이저 서핑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일본인 서퍼 히로토 오하라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었고 일본 세븐일레븐에서 먹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2023.07.xx 서퍼는 왜 긴 머리가 많은지 설명하는 영상을 보았다. 나도 머리카락을 길러서 사람들이 해변에서 우리를 보면 자매인지 형제인지 친구인지 연인인지는 몰라도 서퍼인 건 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중학생 같은 머리를 하고 말없이 서핑을 하는 데 익숙해졌다. 너의 성공한 라이딩을 기뻐하거나 질투하지 않아도 되고, 너의 실패한 라이딩을 아쉬워하거나 은근히 좋아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름다운 날씨를 함께 볼 순 없지만 오늘 날씨가 너무 아름다웠다고 자랑할 계정은 몇 개 갖고 있으니까. 이런 생각으로 몇 개의 파도를 그냥 흘려보내는데 누군가 다가와 “your wave!”라고 외쳤다. 나는 별안간 피팅룸에서 어색하게 걸어 나온 사람이 되어 쭈뼛거린다. 그는 다시 웃으며 “This one!”, “This one!” 반복하고 얼떨결에 파도를 탔으나 바다에 박힌다. 안 어울린다는 말은 들은 뒤 ‘아무래도 그렇지?’ 소심하게 말하던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환히 웃고 있었고 나도 크게 웃어버렸다. 옷 가게를 나오며 옷은 안 사도 된다고 우리의 문제는 갈아입는다고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했던 날, 나의 복잡하고 슬픈 표정과 너의 미묘하고 환멸 어린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데…… “This one!” 외치는 소리 다시 들려오자 이제 나는 머리도 잘라버렸고 서핑은 파도와 나만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팔을 젓는다. 힘이 센 파도가 나를 빠르게 해변으로 밀고 나갔다. 같은 파도를 탄 그가 나를 보며 환히 웃었고 함께 환호하며 주먹 인사를 나누는 순간 해변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았다. 일본인 같은 사람을. 인본인 같다는 말은 이상하지만 어쩐지 일본인의 분위기를 풍기는 너를 분명히 본 것 같은데 힘을 다 쓴 파도가 나를 더는 해변으로 데려가지 않았고 보드 위를 걸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졌다. 나는 한참 두리번거렸지만, “hurry up!” 먼 바다에서 그가 두 팔 벌려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누구를 바라보며 ‘우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날짜 미상 보낸 이 미상 청첩장 우리 이제 바다로 나가자. 말하자마자 온통 바다가 되었습니다. 수평선에서 생긴 큰 파도가 태양을 향해 치솟습니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기분이고요.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기분인데요. 파도는 평생 겪은 것을 다 합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커지는 중입니다. 우리를 배웅하기 위한 사람들이 해변으로 몰려와 박수를 보냅니다. 비로소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가미 없는 우리가 바다로 향하는 일에 대해. 번갈아 서로의 뗏목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 없어 손을 꽉 잡습니다. 곧 휩쓸릴 것입니다. 사람의 발자국이 처음으로 찍힐 작은 섬에서 우리는 눈 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