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촬영된 영상 속에서 나는 몸을 푹 숙인 채 페달을 밟고 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 방에 조용히 울린다. 그다음은 나의 머릿속에서 송출되는 영상. 나는 역시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다. 영원인 듯. 마르지 않는 티셔츠에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진다. 머리칼이 뻑뻑하게 날린다. 입안의 소금기 가시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는 바다가 되지 않았다. 영원함을 얻고 싶은 망각이 호시탐탐 나를 노렸다. 거울에 비친 망각은 한 번도 바다에 빠진 적 없는 사람의 얼굴. 나는 빈방을 채울 수 없고 빈방은 내가 있어도 빈방.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대답해도 응답 없는 바깥. 여전히 뻑뻑한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어떤 기억은 털어내선 안 된다고 되뇐다. 박박 찢은 종이에 적는다. 비행기로 날린다. 곤두박질친다. 내가 닿아야 하는 애도. 방 끝까지 가 떨어진다. 망각과 무기력. 처음으로 돌아간다. 빛을 쥐겠다고 생각했던 날로.
복도에 늘어선 교실에서 나는 며칠만 선생님이었다. 도착하지 못한 저녁이, 박탈되어 부유하는 저녁이, 매일 오후의 햇살과 섞여 쏟아졌다. 복도 끝 교실은 조용했지만 기억으로 들끓었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중앙 통로에 비치된 오르간에 앉았다. 실내화들의 활보를 들으며 건반은 하나씩 눌러보았고 그 소리에 다가온 아이들이 말을 걸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온 곳은 이곳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내가 온 곳에서는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생님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때 어디선가 그만하라는 말이 울렸고 이제 누구는 어제도 학교를 안 나왔으며, 누구는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는 웃는 게 예뻤는데 더는 웃지 않는다고. 숨도 쉬지 않다가 말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창문 없는 교실! 답답해요!” “답답해!” “정말! 답답해요!” 아이들은 소리쳤다. 나는 해주고 싶은 말을 고르며 오르간을 쓸어내렸는데……. “우리 상상해요. 선생님.” “우리는 상상을 해요.” 아이들은 말했다. “그런데 너무 멀어서 아무리 상상을 해도 닿을 수 없는 곳이 있을까요?” 이 질문을 끝으로 모두 침묵했다. 자신의 상상으로 들어간 것인지. 막다른 길에 가로막힌 것인지. 어쩌면 둘 다 일지. 나는 몰랐다. 손에는 오르간 먼지만 쌓여갔다. 나아가고 나아가도 도착하지 못하는 너무 먼 곳이 있을까. 상상을 해도 닿을 수 없는 곳이 있을까. “저는 계속 상상해 보려고요. 닿을지도 모르니까. 계속. 계속.” 종이 울리고 각자의 교실로 흩어지는 동안 나는 나의 대답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함께 들끓을 기억이 없는 나에게는 그저 속 편한 말이었다. 오후의 복도가 물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자책하며 감은 눈으로 상상 바다가 밀려들었다. 질문과 질문 아닌 것들. 소망과 소망 아닌 것들. 아이들은 이 간극을, 분노와 애도를, 기억을, 자신들의 은유를 만들며 통과하고 있었다. 밝고 맑은 얼굴로.
고운 포물선을 그리는 해변과 조용한 포말. 뒤쪽으로 펼쳐진 산등성이. 건물이 가리는 풍경은 하나도 없는 곳. 한밤의 불꽃놀이와 한낮의 선탠. 수십 개씩 만들어졌다가 무너지는 모래성. 숨 막힐 만큼 북적이지 않지만 숨어들기에 적당한 인파가 있는 곳. 이곳은 나의 상상 바다였다. 한껏 달궈졌던 세상이 식었다. 맨발로 딛고 서 있기 힘들었던 모래에 발을 깊게 묻으며 한 발 한 발 걸었다. 세상에 널린 혐오를 알알이 분간했다. 밟아댔다. 혐오는 옷 안에 딸려 집까지 들어온 모래 낱알처럼 나의 세상에 섞여 있었다. 어떤 혐오와도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푸르게 일렁이는 발목을 바라보며 끊어내고 싶은 혐오를 생각했다. 더 긴밀히 연결되어야 하는 기억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우선 나는 상상의 안팎에서 혼자가 되려 했다. 어떤 혐오가 자연스럽게 끊어지는지 또 어떤 혐오가 악착같이 들러붙어 있는지 구분하고 싶었다. 물결 하나하나 바라보듯이. 하지만 단절은 요원했다. 나의 상상 바다는 상상의 막다른 길이기도 했다. 미세 혐오들이 나를 감싸고 돌았다. 내게 필요한 건 계속 해보는 상상이었고. 나는 훈련을 시작했다. 다시 상상 바다에 도착한다. 해변까지 걷는다. 일렁이는 발목을 바라본다. 더 들어가지 못한다. 다시 상상 바다에 도착한다. 해변까지 걷는다. 일렁이는 발목을 바라본다. 더 들어가지 못한다. 어느 날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다. 허리가 잠긴다. 목이 잠긴다. 헤엄을 치고 바다는 고요해진다. 이곳에서 읽고 쓰고 생각하고 써 내려갔다. 웃고 울고 상기되었다. 어느 날 내가 혐오하던 얼굴들이 바다에서 떠올랐다. 그 얼굴을 부표 삼은 혐오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파도치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껴안는 자세까지 취했다. 이곳은 나의 상상 바다인데! 저들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는 왜 저들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가. 모두 내 안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나를 혐오하기 위해 생겨난 나였다. 혐오는 내가 견딜 수 없는 딱 그만큼 내 인생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몰랐니?” 나는 상상력이 빈곤해진다는 느낌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앎이 바닥을 드러내면 꼭 혐오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매번 나를 다그쳤다. 그래서 나를 혐오하는 것이 아주 쉬워졌다. 상상 바다에서 나는 내가 먼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놔두었다. 허물어진 모래집에 초대장을 뿌렸다. 거울을 닦을수록 얼굴을 잃어가는 날들이었다. 나는 나의 파멸을 끌어내고 있었다.
즐거움과 고마움으로 뒤덮인 롤링 페이퍼 한쪽에는 꿈에서도 둘러앉아 우리가 이번 주에 교실에서 했던 활동을 보고 싶은 친구와 꿈에서도 이어 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후 나는 가끔 창문 없는 교실에 모두 같이 둘러 앉아 있는 꿈을 꾸었다.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조용히 웃어 보이며, 종이 울려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얼굴을 다 외울 때까지. 망각이 패배를 선언하고 물러날 때까지. 아침에는 사방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방 안을 맴돌았다. 나는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그 빛을 다 쥐어보겠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