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물풍선을 안은 내가 걸어가고 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는 부자연스럽게 솟아 있고, 이런 햇빛인데도 오들오들 떠는 중이다. 평생 터뜨리지 않을 수 있다는 의뭉스러운 확신을 하고 있다. 동시에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위협하고 기필코 내 손으로 터뜨릴 거라고 윽박지르고 결코 그런 일이 생기게 놔두지 않겠다며 빌고 있다. 빌면서 걷고 있다. 저쪽에서 저쪽으로. 가장 큰 슬픔을 발견하면서. 가장 크게 울면서. 도착한 곳은 해변이었다. 투명한 해파리를 손에 든 사람을 보았다. 그는 골키퍼라도 되는 듯 공중으로 띄운 해파리를 걷어찼다. 나는 해파리가 산산조각 나는 걸 멍하게 바라보았다. 물풍선을 떨어뜨렸다. 와와 웃어대는 사람들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쓰러졌고 그는 쑥스러운 미소로 투명한 해파리가 둥둥 떠 있는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터진 자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몇 번을 쓸어 모아도 다시 해파리가 되지 않았다. 물을 머금은 흙을 뭉쳐서 공을 만들었지만 품에 안자마자 부서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을 해야 했는데 등을 두드리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 오랜 친구였다. 친구는 저쪽을 보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크게 불렀고, 해파리를 산산조각 냈던 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친구는 그를 착하고 성실하며 재미있기까지 한 사람이라 소개했다. 나는 그제야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해변에 누워 그가 이리저리 헤엄치는 것을,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공놀이를 하고 수영 시합을 벌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와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 했지만 햇빛은 너무 무거웠고 피부는 따가웠으며 귓가는 시끄럽기만 했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끝. 낭떠러지. 이별. 죽음. 종말……. 삶이 체불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 얼굴만 새하얗게 떠 있는 나를 가리키며 해파리라고 했다. 그중 몇몇이 와와 웃어대며 내게 다가왔다. “잠시만요! 저는 아니에요.” 나는 소리쳤다. “저기, 저기 있어요. 해파리!” 나는 소리쳤다. 땀과 모래 범벅이 되어 깨어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나는 괜찮구나.’, ‘이번에도 나는 무사히 넘어갔구나.’ 이대로 생각을 끝내고 싶었다. 이대로 생각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머리까지 물속에 집어넣은 채 숨을 참고 다이빙대까지 헤엄쳤다. 뛰어내리기 직전의 표정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파도와 맞닿을 때 튀긴 바닷물이 내 얼굴을 때렸는데 투명한 물방울은 조각 난 해파리 같아서, 그 새끼는 왜 그런 짓을 한 것인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비명을 캭 질렀지만 다이빙대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환호성으로 알고 와와 웃어대며 뛰어들었다. 바닷물을 두 손 가득 떠도 온몸으로 껴안아도 물풍선이 되지 않았다. 그 새끼는 막 두 번째 해파리를 손에 쥐었다. 나는 그 새끼를 향해 헤엄쳤다. 바닷속에서 부유하는 해파리들이 나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나는 안에서부터 산산조각 났다. 몇 년이 흐르고 우연히 수산시장 건어물 가게 앞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그해 여름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래서 아쉽다고 말했다. 해파리를 차면 어떤 감촉일지 궁금하다며 순진무구하게 웃어 보였다. 새벽 4시였다. 나는 써야 할 글이 있어서 밤새 카페를 전전했으나 SNS만 새로고침 하다 집에 가는 길이었다. 그는 먼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말린 오징어 한 묶음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가 변함없이 지랄맞게 성실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순진무구함을 폐기한 그를. 그때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판단력을 잃었었다고 말하는 그를. 나는 가끔 물풍선을 들고 걷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떤 날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어떤 날은 갓길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어떤 날은 불러 세운 뒤 물풍선을 들고 걸었던 날들과 떨어뜨렸던 순간과 묘하게 후련했으며 과하게 죄책감에 시달렸음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물풍선을 내게 잠깐 안겨준 뒤 한때 안아 들었던 느낌을 쥐고 평생 살아가도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나의 물풍선까지 자신이 들고 있다고 걱정 말라는 사람도 있었다. 내 안에서 부서졌던 내가 다시 모여들었다. 나는 물풍선을 안고 걷는다. 순진무구함을 폐기한다. 그날의 산산조각을 잊지 않는다. 해변에 흩어졌던 해파리와 쏟아진 물풍선으로 빚은 모래 공과 내 안에서 부서졌던 나를. 잊지 않는다. 그 새끼가 해파리를 트로피인 듯 들었던 순간과 부유하던 해파리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던 순간을. 그리고 걷는다. 저쪽에서 저쪽으로. 가장 큰 슬픔을 발견하면서. 가장 크게 울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