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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은 매번 약속 시간을 어긴다. 소나기 쏟아지던 하굣길 우리는 처마를 찾아 뛰어다녔다. 가까이 붙어 소용없는 어깨싸움을 하다가 눈이 마주쳤고 옅은 미소로 서로에게 침을 뱉었다. 비든 침이든 상관없다는 듯 웃었다. 이후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고 그날을 입 밖에 꺼낸 적도 없다. 유일한 소나기와 침과 처마 아래의 웃음. 유일했기에 자라면서 누군가가 나를 짓밟으려 할 때마다 그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내게 침을 뱉어도 괜찮은 사람을, 재연할 수 없어 영원한 한순간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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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그치지 않은 비는 운동장을 수영장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다 놀았느냐는 물음을 더 놀아도 좋다는 허락이라 믿었다. 우산 하나에 두 명, 네 명, 여섯 명까지 붙어 낑낑대다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일부러 물웅덩이 밟으며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등판에 달라붙은 얇은 면 셔츠들이 교실 형광등 아래에서 반짝였다. 교탁 옆 텔레비전에서는 교장 선생님이 방학식을 선언하고 있었다. 나는 환하게 드러난 친구의 등에 난 점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다시, 다시, 하나, 둘, 셋, 넷…….
나와 친구가 반쯤 바람 빠진 축구공을 번갈아 차면서 교문을 나섰을 때 경비 아저씨는 내버려진 우산을 거두었다. 축구공이 자동차 아래로 들어갔지만 공을 주워 오자고 말하는 사람 없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나는 어쩐지 막 씻고 나온 기분이었다. 그해 방학 내내 퇴근한 부모님은 오늘 집에 누가 왔었는지 물었다. 하지만 매번 격렬하게 냉장고를 비워댄 건 모두 나였다. 다음 방학식에 다시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다시 그날처럼 친구들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면, 나도 다시 그날처럼 젖은 셔츠에 비친 친구의 등을 바라보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개학하고 나는 교실 맨 뒤에 앉게 되었다. 이제 친구의 등은 멀리 있었다. 나는 경비 아저씨가 방학식 때 거둬 꽂아둔 우산을 얌전하게 쓰고 다녔다. 친구를 잊어갔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환한 등과 일곱 개의 점뿐이다. 이런 단서로는, 물론 단서도 아니지만, 친구를 찾을 수 없을 테고 찾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날이 여름의 정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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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때까지 매일 몇 시간을 걸어야 했던 여름에는 식지 않는 여름이 지옥 같았다. 나는 여름이 풍기는 냄새가 역해 코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여섯 바퀴를 구른 자동차 안에서 기어 나온 뒤, 여름은 어디서든 피비린내를 풍겼다. “나는 너를 증오해.” 우리는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눈을 들 수 없어 손차양을 내리지 못했던 여름, 나는 나의 파멸을 끌어낼 거라고 다짐했고 그렇게 빚었던 죄책감은, 죄책감이라고 믿은 실루엣은, 오만함이었다.
주변에서는 “딱 한 번 일어난 일”이라 말하며 위로했다. 하지만 무한의 시간 속에서 반드시 한 번은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빠짐없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건 순으로 한 번. 감정 순으로 한 번. 망각 순으로 한 번. 하지만 오랫동안 써내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나는 이제 손차양 없이 햇빛도 빤히 쳐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여름, 나의 비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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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시원한 비가 쏟아지고 식물들을 옥상으로 옮겼다. 여름은 식물을 맹렬히 자라게 하거나 죽어가게 한다. 식물은 비를 견딜까. 환영할까. 나는 맴돌고 있는 걸까. 헤매고 있는 걸까. 혹은 기다리고 있나. 아님 실종되고 있나. 나는 생각을 그치지 않는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삶의 변곡점으로 가득 채웠던 모든 여름이 빨려 들어갔던 똑같은 수챗구멍 안으로. 꽉 막혀 역류하기 전에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성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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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뙤약볕은 견딜 만했다. 부산과 습도를 비교한 뒤에야 내가 버리고 온 것이 바다라는 것을, 바다가 난반사한 여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바다에 갔고 다 바다에 던져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난반사된 여름을 다 걸어볼 것이다. 나는 바다에 떠 있는 서프보드, 바람 빠진 축구공, 뒤집힌 자동차, 견고하다고 믿었던 모래성. 그리고 정체불명의 캐리어가 된다.